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때로는 시간이 멈춘 듯 변치 않는 맛과 풍경이 그리울 때가 있다. 어린 시절, 할머니 손을 잡고 찾았던 시골집처럼, 편안함과 따스함이 느껴지는 곳. 그런 곳을 찾아 떠난 여정 끝에, 경남 거창의 깊숙한 곳에서 ‘황산고가’라는 이름의 한옥 맛집을 발견했다.
작은 지방 국도를 따라, 나지막한 돌담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니, 기와지붕이 얹어진 고풍스러운 한옥이 눈에 들어왔다. 낡은 나무 대문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졌고, 담벼락 아래에는 이름 모를 들꽃들이 소담스럽게 피어 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풍경에, 나는 잠시 숨을 멈추고 그 아름다움을 가슴에 담았다. 예약 없이는 발 디딜 틈조차 없다는 이야기에 미리 서둘러 예약을 해두길 얼마나 다행스러워했는지 모른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은은한 나무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마루에는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나무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창밖으로는 푸른 나무들이 싱그러움을 더했다. 정갈하게 놓인 방짜유기 그릇들이 햇빛에 반사되어 은은한 광채를 뽐내는 모습은, 마치 귀한 손님을 맞이하는 듯한 따뜻한 환대처럼 느껴졌다. 징장이 직접 만들었다는 묵직한 놋 수저를 손에 쥐니, 어릴 적 할머니 댁에서 밥을 먹던 기억이 떠올라 마음이 포근해졌다.
자리에 앉자, 곧바로 상이 차려지기 시작했다. 형형색색의 나물들이 방짜 유기 그릇에 정갈하게 담겨 나왔는데, 그 모습이 마치 예술 작품을 보는 듯했다. 갓 지은 따뜻한 밥과 함께 차려진 음식들은 하나하나 정성이 가득 느껴졌다. 사진으로만 보던 밥상이 눈앞에 펼쳐지니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젓가락을 들어 나물 하나하나 맛을 보았다. 직접 채취한 나물들이라 그런지, 시중에서 파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신선함이 느껴졌다. 쌉쌀하면서도 향긋한 맛이 입안 가득 퍼져 나갔고, 먹으면 먹을수록 건강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특히, 거창의 토속 음식인 고추 다진 양념은 잊을 수 없는 맛이었다. 어릴 적 시골에서 먹던 그 맛 그대로였다. 고추장의 텁텁함 대신, 깔끔하면서도 깊은 감칠맛이 나물 본연의 맛을 더욱 살려주었다. 놋그릇에 담긴 밥에 각종 나물을 넣고 고추 다진 양념을 넣어 쓱쓱 비벼 먹으니,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입 안에서 펼쳐지는 다채로운 맛의 향연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향수 그 자체였다.

사실 나는 평소에 보쌈을 즐겨 먹는 편은 아니다. 특유의 미끄덩거리는 식감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산고가의 보쌈은 달랐다. 겉은 쫄깃하고 속은 촉촉한,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맛이었다. 특히, 보쌈 속에 통째로 들어있는 매실은 신의 한 수였다. 달콤하면서도 상큼한 매실의 풍미가 느끼함을 잡아주고, 입안을 개운하게 만들어 주었다. 매실차는 종종 마셔봤지만, 통매실을 먹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익숙한 듯하면서도 색다른 보쌈의 매력에 푹 빠져 버렸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조기구이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별미였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조기구이는, 담백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일품이었다. 젓가락으로 살을 발라 따뜻한 밥 위에 올려 먹으니, 입 안에서 살살 녹는 듯했다. 짭쪼름한 간이 밥과 어우러져, 밥도둑이 따로 없었다.
10년 만에 다시 찾은 황산고가의 맛은, 변함없이 훌륭했다. 예전보다 가격이 5천 원 정도 올랐지만, 상차림의 수준과 나물의 종류를 보면 전혀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훌륭한 음식을 이 가격에 맛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요리강사라는 한 방문객의 말처럼, 맛을 음미하는 과정 자체가 미식 공부가 되는 곳이었다. 재료 본연의 맛을 이토록 잘 살려낸 음식을 서울에서 맛보려면, 분명 1인당 7~8만 원은 족히 줘야 할 것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후식이었다. 예전에는 유과를 주셨다고 하는데, 여름에는 유과를 제공하지 않는다고 한다. 황산고가의 유과는 워낙 맛있어서 따로 판매도 할 정도라고 하는데, 맛보지 못해 아쉬움이 남았다. 물론, 다른 후식이라도 준비해주셨다면 더 좋았겠지만, 훌륭한 식사 덕분에 아쉬움은 금세 잊혀졌다. 맑고 투명한 빛깔의 매실차를 천천히 음미하며, 입안에 남은 음식의 여운을 즐겼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고즈넉한 한옥 위로 붉은 노을이 드리우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그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 담았다. 10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변함없이 맛있는 음식을 맛볼 수 있어서 행복했다. 다음에는 초여름이나 가을에 방문해서, 더욱 풍성한 제철 나물을 맛보고 싶다. 거창 맛집, 황산고가. 잊지 못할 맛과 풍경을 선물해준 이곳에, 나는 다시 한번 방문할 것을 다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