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기억 속, 낡은 초록색 간판이 뇌리에 박힌 곳이 있다. 은평세무서 건너편, 30년 넘는 세월 동안 한자리를 지켜온 서부감자국. 응암동 대림시장 감자탕 골목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나는 이곳의 슴슴한 감자국이 더 끌렸다. 세월이 흘러, 그 맛을 다시 찾아 나섰다.
6호선 역촌역에서 내려 15분 정도 걸으니, 멀리서도 익숙한 초록색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전문 서부감자국’이라는 큼지막한 글씨가 정겹다. 가게 앞에는 차 두어 대 정도 주차할 공간이 있었지만, 저녁 시간에는 불법 주차가 꽤 있는 듯했다. 대중교통이 조금 더 편할 수도 있겠다 생각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예전 좌식 테이블은 모두 입식으로 바뀌어 한층 깔끔해진 모습이었고, 벽면에는 여러 연예인들의 친필 싸인과 사진들이 빼곡히 붙어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아온 맛집임을 실감하게 되는 풍경이었다.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보니, 감자국과 우거지 감자국 두 종류가 있었다. 예전에는 겨울에 굴김치를 줬던 것 같은데, 이제는 따로 주문해야 한다고 해서 조금 아쉬웠다. 고민 끝에 우거지 감자국 중자를 주문했다. 둘이 먹기에 충분한 양이지만, 남은 건 포장해갈 생각이었다. 가격은 예전에 비해 크게 오르지 않은 듯했다. 메뉴판 옆 벽면에는 ‘우리 업소에서는 국내산 뼈만 사용합니다’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주문 후, 밑반찬으로 김치와 당근, 쌈장이 나왔다. 겉절이 스타일의 김치는 양념이 듬뿍 발려 있어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젓갈 향이 살짝 나는, 칼칼하면서도 깊은 맛이었다. 슴슴한 감자국과의 조화가 기대되는 맛이었다.

드디어 우거지 감자국이 테이블에 놓였다. 냄비 안에는 큼지막한 등뼈와 푹 익은 감자, 그리고 푸짐한 우거지가 가득 담겨 있었다. 처음 나왔을 때 국물은 맑은 편이었는데, 끓일수록 감자 전분이 풀어지면서 점점 진해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코를 찌르는 강렬한 향 대신, 은은하게 퍼지는 생강 향이 왠지 더 기대감을 높였다.
가장 먼저 푹 익은 우거지부터 맛봤다. 국물을 머금은 우거지는 입안에서 부드럽게 녹아내렸고, 은은한 단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역시 우거지 추가는 필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거지 자체로도 맛있었지만, 국물에 깊이를 더해주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잘 우러난 국물을 등뼈와 함께 덜어 한 숟갈 맛봤다. 라면 스프를 연상시키는 칼칼함과 감칠맛이 느껴졌다. 그렇다고 해서 자극적이거나 텁텁한 맛은 전혀 아니었다. 맑고 깔끔하면서도 깊은 맛이 일품이었다. 끓이면 끓일수록 국물이 진해지면서 더욱 깊은 맛을 냈다.
등뼈는 국내산을 사용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살밥이 굉장히 많이 붙어 있었다. 뼈를 똑 부러뜨려 살점을 발라 먹으니, 쫄깃하면서도 부드러운 식감이 느껴졌다. 특히, 살코기 사이사이에 스며든 국물 맛이 일품이었다. 뼈에 붙은 살을 발라 먹는 재미도 쏠쏠했다.
포슬포슬하게 익은 감자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별미였다. 젓가락으로 살짝만 건드려도 부서지는 부드러움.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듯한 식감과 함께, 은은한 단맛이 퍼져 나갔다. 겉절이 김치를 올려 먹으니, 슴슴한 감자와 매콤한 김치의 조화가 환상적이었다.
어느 정도 건더기를 건져 먹고, 라면 사리를 추가할까 고민했다. 하지만, 볶음밥을 포기할 수 없어 밥만 볶기로 했다. 남은 국물에 김치와 김가루, 참기름을 넣고 볶아주니, 매혹적인 볶음밥이 완성됐다. 역시, 감자국 국물에 볶음밥은 진리였다.

볶음밥 한 입을 입에 넣으니, 고소하면서도 짭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숟가락을 멈출 수 없는 마성의 맛이었다. 배가 불렀지만, 볶음밥을 남길 수는 없었다. 싹싹 긁어먹고 나서야 아쉬운 마음을 달랠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계산을 하려는데, 카운터 옆에 쌓여있는 굴이 눈에 들어왔다. 겨울철 한정으로 판매한다는 생굴이었다. 김치에 싸 먹으면 환상적인 맛이라고 하니, 다음에는 꼭 굴과 함께 감자국을 먹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부감자국은 화려하고 자극적인 맛은 아니었지만, 슴슴하면서도 깊은 맛이 매력적인 곳이었다. 마치 어릴 적 할머니가 끓여주시던 따뜻한 국물처럼, 정겹고 편안한 맛이었다. 은평구에서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다만, 몇 가지 아쉬운 점도 있었다. 사람이 많아 바쁠 때는 서비스가 조금 부족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우거지를 추가해야 한다는 점도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맛있는 감자국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곳이었다.
다음에 방문할 때는 우거지 감자국에 굴을 추가해서 먹어봐야겠다. 그리고, 볶음밥은 무조건 필수 코스다. 서부감자국은 응암동 주민들에게는 추억의 맛집이고, 외지인들에게는 새로운 감자탕 경험을 선사하는 맛집이 될 것이다. 특히 맑고 깔끔한 국물, 푸짐한 국내산 등뼈, 그리고 겉절이 김치의 조합은 잊을 수 없는 맛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따뜻한 감자국 국물과 겉절이 김치 맛이 계속 맴돌았다. 다음에는 부모님을 모시고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분명, 부모님도 어릴 적 추억을 떠올리며 맛있게 드실 것이다. 서부감자국은 단순히 맛있는 음식을 파는 곳이 아니라, 추억과 정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