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날들이 있다. 빽빽한 도시의 빌딩 숲을 벗어나, 정겹고 따스한 풍경 속에서 넉넉한 인심을 느끼고 싶어지는 그런 날.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곳이 있다. 부산 화명동 골목 깊숙이 자리한, 이름마저 정겨운 ‘할매 쌈밥’이다. 복잡한 산성터널 입구를 지나, 네비게이션의 안내를 꼼꼼히 따라 좁은 골목길을 헤쳐 나갈 때쯤, 드디어 그곳이 모습을 드러낸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마치 오랜 친구 집에 방문한 듯 편안한 분위기가 나를 감싸 안는다. 테이블은 이미 손님들로 가득 차 있었고,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정겹게 울려 퍼졌다. 혼자 온 손님은 없는 듯했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당당하게 자리를 잡았다. 메뉴는 단 하나, 쌈밥 정식. 인원수만 말하면 주문은 자동으로 완료된다. 이런 단순함이 오히려 믿음직스럽게 느껴지는 건, 오로지 맛으로 승부하겠다는 주인장의 자신감이 느껴지기 때문일까.
잠시 기다리는 동안, 주변을 둘러보았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나무 테이블과 의자, 벽 한 켠에 걸린 낡은 액자, 그리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직원들의 모습에서, 오랜 세월 이 자리를 지켜온 식당의 역사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홀서빙을 하는 사장님의 무뚝뚝한 표정이 살짝 아쉬웠지만, 맛있는 음식을 향한 기대감은 그것마저 덮어버릴 만큼 컸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쌈밥 정식이 상 위에 차려지기 시작했다. 쟁반들이 하나 둘씩 놓일 때마다, 탄성이 절로 나왔다. 그야말로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진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광경이었다. 젓갈, 쭈꾸미볶음, 꼬막, 생선구이, 게장, 고등어조림, 된장찌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반찬들이 테이블 위를 가득 채웠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쭈꾸미볶음이었다. 매콤한 양념 냄새가 코를 자극했고, 탱글탱글한 쭈꾸미의 식감이 입 안 가득 퍼져 나갔다. 젓가락을 멈출 수 없는 마성의 맛이었다.
싱싱한 쌈 채소도 빼놓을 수 없다. 다시마, 양배추, 찐 배추, 상추, 당귀 등 다채로운 채소들이 보기 좋게 담겨 나왔다. 특히 다시마의 짭짤한 바다 향은, 입맛을 돋우는 데 제격이었다. 쌈장과 젓갈을 곁들여 쌈을 싸 먹으니, 신선한 채소의 아삭함과 짭짤한 양념의 조화가 환상적이었다.

고등어조림 또한 훌륭했다. 큼지막한 고등어 한 토막이 매콤한 양념에 푹 졸여져 나왔는데, 젓가락으로 살짝만 건드려도 부드럽게 살이 발라졌다. 밥 위에 올려 슥슥 비벼 먹으니, 꿀맛이 따로 없었다.

이 집의 특징 중 하나는, 쌈밥집임에도 불구하고 육고기보다 해산물이 더 많이 나온다는 점이다. 쭈꾸미, 꼬막, 굴 등 신선한 해산물들을 쌈 채소와 함께 즐길 수 있다는 점이, ‘할매 쌈밥’만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꼬막은, 짭짤하면서도 쫄깃한 식감이 일품이었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었다. 몇 년 전보다 가격이 조금 오른 데다, 나물 반찬 리필이 안 된다는 점은 살짝 아쉬웠다. 하지만 푸짐한 양과 맛있는 음식들을 생각하면, 충분히 감수할 만한 부분이었다. 그리고 밥맛이 예전 같지 않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내 입맛에는 괜찮았다. 숭늉처럼 구수한 맛이 나는 따뜻한 물을 부어 누룽지처럼 먹으니, 입가심으로 그만이었다.
정신없이 쌈을 싸 먹고, 밥을 비벼 먹다 보니, 어느새 배가 빵빵하게 불러왔다. 하지만 젓가락을 놓을 수가 없었다. 남은 반찬들이 자꾸만 나를 유혹했기 때문이다. 결국, 밥 한 공기를 더 추가하고 나서야, 겨우 식사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계산을 하고 나오면서, 주인 할머니에게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라고 인사를 건넸다. 무뚝뚝한 표정은 여전했지만, 왠지 모르게 따뜻함이 느껴졌다. 아마도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제공해 온, 할머니의 진심이 전해진 것이리라.
‘할매 쌈밥’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곳이 아닌, 마음까지 따뜻하게 채워주는 곳이다. 푸짐한 음식과 정겨운 분위기 속에서, 마치 고향에 온 듯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화려한 레스토랑이나 트렌디한 카페도 좋지만, 가끔은 이런 소박하고 정겨운 곳에서, 진정한 맛과 행복을 느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다음에는 부모님을 모시고 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할매 쌈밥’을 나섰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걸어 나오면서, 왠지 모르게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것이 바로 ‘할매 쌈밥’의 매력이겠지.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부산의 야경이 아름다웠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는, ‘할매 쌈밥’에서 맛보았던 푸짐한 쌈밥과 따뜻한 정이 더욱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다음에 또 방문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나는 집으로 향했다. 부산 화명동 지역 주민들에게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숨겨진 맛집, ‘할매 쌈밥’에서 잊지 못할 한 끼 식사를 경험한 날이었다.




